피아노를 전공했던 종교적이며 엄격한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는 알코올에 중독된 가장이었기에 빌 에반스는 일찍부터 자기 파괴적이며 내적인 감성을 본의 아니게 키웠을 것입니다. 다정했던 형과는 함께 음악을 하며 미래를 꿈꾸었지만, 어른이 된 후 자살한 형의 그림자 역시 예민했던 그의 마음에 커다란 아픔을 주었을 것입니다. 자식이 없었던 첫 번째 부인과 함께 했던 마약복용, 그리고, 갑작스러운 그녀의 자살 역시 겨울비와도 같은 스산함으로 빌 에반스를 더욱 마약에 빠지게 했을 것입니다.
따스한 봄날, 빌 에반스가 사랑했던 조카를 위해 만들었던 'Waltz For Debby'를 떠올리다 보면 조카에 대한 애정이 극에 달했던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가 연상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공연과 음반의 성공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곧바로 마약을 구입하는데 쓰였고, 그것도 부족해서 여기저기 빚까지 지며 상습적으로 마약을 복용한 빌 에반스는 자신을 파괴한 것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불태웠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가장자리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떠나보내게 된 현실을 인내하기에는 너무도 여리고 예민했을 테니까요.
피아노 건반위로 머리를 파묻으며 연주에 심취했을 때의 빌 에반스의 모습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라 해도 그의 연주에는 설명하지 못할 비애가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