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린 것은 다른 것이 되었다.
절대권력의 시대, 가치판단의 기준은 절대적 기준. 이 시대에는 '다르다'보다 '틀리다'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인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다르다'는 쓰였다. 이 시대에 틀린 것은 '가치판단'이고 다른 것은 '가'와'나'이다.
민중권력.민주권력의 시대, 권력의 힘이 약한 만큼 가치판단의 기준 자체도 점점 줄어들고, 이전에 이미 있던 기준을 내 세울 때 조차도 '
OrICouldBeWrong'이 항상 따라 붙는다. 바로
다양성의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틀리다'보다 '다르다'는 말이 더 자주 쓰인다. 이전 시대로부터의 과도기에는 과거의 언어습관으로 인해 '다르다'가 '틀리다'로 잘못 사용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틀리다'는 쓰인다. 이 시대에 틀린 것은 '해답이 정해진 문제에 대해 제출한 답이 틀린 것'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다른 것이다. 심지어 가치판단과 윤리문제에 대한 의견 등에서 모두 마찬가지로 다른 것이다. '다르다'가 자주 쓰이면서 '틀리다'로 잘못 쓰인 경우들이 옛날에 비해 눈에 잘 띄었던 모양이다. 옛날 같으면 그냥 넘어가 버렸을 것들도 꼭 꼬집고 넘어간다. "그건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야" 라고 하며.
틀린 것이 많던 그 시절이 다른 것이 많은 이 시절에 비해 사는 것이 훨씬 수월했을 것 같다. 하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날아가 살아 본다면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혀를 마구 굴리다가 사약을 받아 들고서 한다는 말이 이러겠지. "수월한 삶이 다 좋은 건 아니구나, 흑흑흑"
점점 사라져 가는 "틀린 것"들. 다른 것들만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남은 일은 이제 "상대방을
설득하고 여러 길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닐까. "
뭬야?"라며 상대방을 혼구녕낼 만한 가치란 것도 결국 함께 사라져 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회초리, 즉 어른들의 독재수단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이렇듯 그 뜻이 퇴색해 버린 회초리를 쓰려다가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상처를 입고 떠나간 일이 있었다. 양자 모두 안타깝기 그지 없는 노릇이다.
우리에게는 이제 '그래도 되는' 어른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되는' 아이도 없다. 온라인에서는 똑 같이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노스모크에서도 말 한마디 할 때가 그렇게 조심스러웠고 어떤 때는 뜻하지 않게 어줍잖게 '판단'을 하게 된 것이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꾸짖을 사람도 없고 꾸짖을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이런 세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 모두가 한 번쯤 심사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뭔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다양성을 지향하다보면 분명 그런 날은 오고야 말 것이다. 꾸짖을 사람이 없다면 과연 무엇에 기대고 살아야 할까.
맑은이에게는 이것이 참으로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숙제이다. 숙제로 남겨놓고 넘어가자.
맑은이는 어린일까 어른일까 노인일까, 과연 누가 그것을 알까. 모르기에 제멋대로일 수도 있겠지만, 모르기에 서로가 서로를 편견없이 대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온라인커뮤니티가 우리들에게 주는 기회이다. 그 속에서 다시 태어나 모든 편견들을 훌훌 벗어던져야만 한다. 어? 나만 그러면 되는 건가? 앗, 곁가지를 경계하며 계속 써 내려가자.
그렇다. 지금 우리는 다양성의 시대에 산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겨우 태동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본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다양성의 시대로 접어 든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이런 좋은 날에 그런 시대가 온 줄도 모르고 과거를 답습하고 있는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정부부문에서는 군대와 공무원들의 세계가 그러하고, 민간부문에서는 깡패조직이 대표적 잔재일 것이다. 우리나라가 절대권력의 시대를 접고, 세습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나라의 일꾼을 뽑고, 왕권이 아니라 민권을 위한 일꾼이 되길 소망했던 현대사도, 군부독재가 종식될 때까지는 여전히 절대권력의 시대였다고 밖에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군부독재를 끝장 냈다 하여 곧바로 민주와 다양성의 시대로 달려갈 수가 있었을까? 물론 아니다. 왜일까?
그 다음 시대가 먼저 태동해야 하고, 그 다음 시대로 달리려면 먼저 걸어야 하니까. '태동'은 민주주의와 다양성의 시대에 걸맞는 최소한의 법제들이 잘 다듬어졌는가를 보는 것이고, '걸음마'는 상대방을 존중하며 토론하는 자세를 배우는 것이고, '달리기'는 그 바탕 위에서 부딪힘을 매끄럽게 아름답게 훌륭하게 해결하며 공존의 가치를 높여 가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 중에서 꿈틀거리는 태동기에 살고 있지 않나 싶다. 이 역시도 이분법으로 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우리는 다양한
온라인커뮤니티에서 '꿈틀 거리며 동시에 걸음마를' 배우고 있는 상태라고 본다.
OrICouldBeWrong
그러기에 우리들의 말과 글들이 얼마나 부족한 것이 많고 불완전한 것이 많겠는가? 옳고 그르고 틀리고 맞고 그런 얘기가 아니다. 감정의 기복을 제어할 능력들이 그 만큼 넉넉치 못할 것이기에 글에서도 대부분의 심정들은 나타나게 마련인데, 앞서 부족한 글이라 한 것은 바로 그런 뜻이다. 약간의 부딪힘이란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부딪힘에 노출된 당사자가 그가 누군든 간에 당사자들은 극단적 반응을 자제하며 훌륭하게 마인드컬트롤을 마쳐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또 어떤 이는
맑은이의 이 말이 너무도 답답하고 짜증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를 끌어가고 있는 우리들의 수준이 그 정도라는 걸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면 부딪힘을, 부딪힘에 대한 반응들에, 울그락불그락 하며 달려 들거나 마음에 상처를 얻어 다시는 쳐다 보기 싫은 상대로 낙인 찍거나, 그런 가슴 아픈 일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소망한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서로 다른 사람들이 슬기롭게 함께 살아가는 공간으로
노스모크가 거듭날 수 있기를.
선의 폭력이란 말을 들어 보았는가. 폭력이면 이미 악인데 선이 행하는 폭력이 있을 수가 있나? 그건 모순이다. 그렇다, 이 말을 쓰고 있는
맑은이조차도 듣도 보도 못한 쓰는 이것이 처음인 말이다. 그것은 다양성의 시대에만 그 뜻이 존재할 수 있다. 다양성의 시대가 아니라면 '선의 폭력'이란 말 자체는 성립할 수가 없다. 대충 이런 이야기다. 휴머니즘이라 하여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인간을 마음에 두고 하는 모든 일이 '선'일 때는 문제가 없으나 의도하지 않게 '악'이 되었을 때는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매장을 하는 순간에조차도 그것이 악인지를 모른다. 다만, 매장당한 사람이 더 이상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외로울까를 느낄 때, 비로소 모두를 위한 선한 행동이라 했던 것이 악이었음을 폭력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 악의 존재를 어찌 선을 행하는 처음부터 알 수 있겠는가. '결과로서 최악'인 것이다. 한 쪽의 선을 위해 다른 한 쪽을 희생시키는 것이기에, 선한 색의 안경을 끼고 있는 한 절대 악의 존재를 눈치챌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선의 폭력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노스모크에서조차도 여러번 경험했다. 영화『
Minority Report(소수의견)』를 보면, 선이 행하는 폭력의 극단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아, 그런 것이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는 안 되지, 감탄을 연발하는 영화다. 그 영화의 스토리 자체는 일반적인 음모론적 전개이다. 거기서 음모를 빼고 보면 감독이 주는 것 이상을 볼 수 있다. 음모가 없었다 해도 그런 극단의 모습은 단순한 선의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영화에 나오는 범죄예방시스템은 금단의 꿈이었고 선의 폭력이었다. 범죄예방시스템은 많은 사람들을 범죄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저지르는 합법적이고 극안한 범죄였다는 걸 알 수가 있다.
다름을다름으로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던 위정자들에게 '다름을 틀림으로 오인하기'는 너무도 익숙하였기에 잉태된 슬픈 현실이었다는 것. 모든 걸 한 가지로 재단할 수 있다는 오만과 편견 속에서 비롯된 결과였다는 것.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는데 익숙해질 수 있는 가치관과 그 습관들의 확산을 통해서만 그러한 '위하는 것이니 괜찮다는 식의' 무모한 현실을 극복해 낼 수 있으리라는 것. 영화가 끝날 때 쯤 보여지는 평온한 삶의 모습, 세상의 불완전한 질서가 주는 안도감.
나는 정말 수도 없이 깨닫는다, 인간을배제한논리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다는 걸. 인간을 위한다는 논리가 결국은 인간을 가두고 말 것이라는 걸.
그 깨달음이
다르다와틀리다와 무슨 상관이 있지? 우리가 흔히 지나치기 쉬운 지점, 좋은 것이 좋다는 바로 그 지점, 다시 말해 악에 대항할 때뿐만이 아니라 뭔가 지극히 선한 것이 나를 유혹하고 그 선한 길로 내가 깊이 빨려 들어가고 있을 때에도 우리는 그곳에 '너무 획일화 되어 가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물음표를 꼭 던져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글의 시작에 '역사적 관점에서'라는 토를 달아 놓았는데, 각 시대의 윤리적 관점과 그 흐름을 본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이 시대에는 윤리적 관점에서의 '틀리다/맞다'는 그 자체로 참으로 위험한 것 같다.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획일화'로 치닫게 마련이라는 것. '선의 폭력'이 있을 수 있음을 알고 나니까 '절대 선'의 존재는 간단히 부정되고 만다. 안타깝다, 그러면 도무지 어디에 기대고 살아야 할까? 기댈 생각말고 똑 바로 서서 살라고? 아이고 다리 아파라. 아이고 허리 아파라. 그래도 기댈 곳이 한 군데쯤은 있어야, 고단한 생을 조금이라도 쉬어가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기댈 곳이, 딱 한 군데 있긴 하다. 그 곳은 바로
물음표. 물음표에 기대어 살라고? 기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원성이 마구 들려온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맑은이가 그 딜레마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이 물음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물음표를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행동이 바람직하지 못해 보일 때에도 "그렇게 하면 안 돼." 라기보다는 "이렇게 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그렇지 않니? 내 생각은 이런데 니 생각은 그래?" 라고 하면 참 듣기도 좋을 것 같고, 듣는 사람은 두 가지 생각을 양손에 들고 번갈아 보니, 자신이 마치 상대방과 같은 무게로
존중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들뜬 기분이 몇 달은 갈 것만 같다. 그런 타이름은 한 번을 들어도 백 번을 들은듯, 귀에 쏙 들어 올 것만 같다. 귀에 들어온 것이 있으니, 내 것과 둘을 같이 펼쳐 놓고 이른바
생각이란 걸 하게 될 것만 같다. 같은 이치로 "틀리다? 맞다?, 옳다? 그르다?, 나쁘다? 좋다?, 악하다? 선하다?, 뭐? 왜? 그래?" 모든 곳에 물음표를 던져 보자. 이 물음표가
다르다와틀리다를 알게 하고 나의 행동이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고 믿는다.
칭찬? 그건 난 잘 모르겠다. 나는 칭찬을 들어본 적도 있고 매를 맞아본 적도 있다. 매를 맺았을 때의 기분이라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칭찬을 들었을 때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무엇이 필요할 때에 필요한 그것을 했을 뿐인데 그 상황에다 대고 칭찬을 한다는 것이 썩 이치에 맞는 일처럼 느껴지지가 않았었다. 그에 비하면 존중의 느낌은 백팔십도 다르다. 칭찬은 타인에게 한 번 더 칭찬받고 싶은 욕망만 낳을 뿐이었지만
존중? 그것은 타인에 대한 집착을 떨치고 기대도 떨치고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해야'할 것만 같은 생각, 어찌보면 "어른이 되라!"라는 무슨 특명과도 같은 신호로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은 칭찬과 존중에 대해 어떻게 느꼈을까?
맑은이는 그렇게 느꼈다.
칭찬과 존중?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물음표 없이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표할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매사에 물음표를 남발하며 살아보자. 그러다보면 물음표가 너무 많은 것도 문제다 싶은 때도 닥쳐올 것이다. 그런 때가 오면 다양성의 시대에 걸맞는 공존의 가치를 한 층 더 쌓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말과 글은 시소를 탄다. 처음에는 말이 글이 되었지만, 말에 감정이 실리면 그 때는 글로서 말을 다듬게 된다. 물음표와 마침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물음표를 던지다 보면 언젠가 마침표가 나올 것이다. 한 번 끌어낸 마침표도 영원한 것이 아니고 또 다시 물음표로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물음표와 마침표 사이에서 시소를 타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니겠는가? 사실, 마침표는 꼭 내가 찍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나는 열심히 물음표만 찍어도 내 삶을 다하기가 버겁기만 하다. (어? 마침표다)
물음표는 다른 것이고 마침표는 틀린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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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05.11.30(수) 처음쓰고, 2009.3.24(화) 끝말을 맺으려다 끝말이 또 흐리멍텅해져 버림.